GPT와 Gemini의 강세 속에서, 시기를 놓친 후발 주자라는 평가와 초기 버전들의 아쉬운 성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줄어들었던 Grok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25년 5월, xAI가 공개한 Grok 3.5 베타는 기존 대형 언어 모델들과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SuperGrok 구독자들에게 우선 배포된 이 모델의 핵심은 '제1원리 추론(First Principles Reasoning)'이라는 개념이다.
일론 머스크는 이를 두고 "로켓 엔진이나 전기화학 같은 기술적 질문에 정확하게 답할 수 있는 첫 번째 AI"라고 평가하며, "인터넷에 존재하지 않는 답을 만들어낸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성능 향상을 넘어선, AI의 사고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시사한다.
과연 Grok 3.5는 정말로 '생각'하는 AI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까.
제1원리 추론의 본질
제1원리 추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적인 사고 방식과의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
관습적 사고의 예시: "전기차 배터리가 비싸다. 따라서 전기차는 당분간 고가 제품일 수밖에 없다."
제1원리 사고의 예시: "전기차 배터리의 구성 요소는 리튬, 코발트, 니켈, 탄소 등이다. 런던 금속거래소에서 이들 원재료의 가격을 확인해 보니 킬로와트시당 약 80달러 수준이다. 그렇다면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 비용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최적화할 수 있을까."
제1원리 추론은 복잡한 문제를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구성 요소로 분해한 다음, 그 기초 사실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는 사고 방식이다.
역사적 제1원리 사고의 사례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나"라는 의심할 수 없는 출발점을 발견했다.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에서 시작해 만유인력 법칙이라는 보편적 원리를 도출했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전제에서 시공간에 대한 기존 개념을 완전히 뒤엎는 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존 지식의 단순한 조합이 아닌, 기본 원리부터 시작하는 창조적 사고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AI에서의 적용:
기존 LLM들의 접근 방식:
질문 입력 → 관련 웹 정보 검색 → 다양한 소스 조합 → 답변 생성
Grok 3.5의 제1원리 접근:
질문 입력 → 기본 물리법칙 확인 → 수학적 원리 적용 → 논리적 추론 → 답변 도출
예를 들어 "지구 탈출속도"에 대한 질문에서 Grok 3.5는 웹에서 답을 찾는 대신,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부터 시작해 중력 퍼텐셜 에너지와 에너지 보존 법칙을 적용하여 v_e = √(2GM/R) 공식을 단계적으로 도출한다.
현재 LLM들의 구조적 한계
대부분의 AI 시스템이 가진 근본적 문제는 검색 확증의 무한 루프에 있다.
현재 GPT나 Claude 같은 모델들은 RAG(Retrieval-Augmented Generation) 방식으로 실시간 웹 검색을 통해 정보를 보강한다. 하지만 이는 몇 가지 구조적 문제를 내포한다.
첫째, 무한 확증 순환: "이 정보가 정확한가" → 웹 검색 → "검색 결과가 신뢰할 만한가" → 추가 검색 → 무한 반복
둘째, 웹 정보의 신뢰성 문제: 인터넷상의 정보는 틀리거나 편향되거나 오래된 경우가 많다. AI가 이런 정보를 기반으로 답변을 생성하면 "논리적으로 보이는 오류"가 발생한다.
셋째, 창조적 한계: 기존 정보의 재조합만으로는 진정한 혁신적 해답을 만들어낼 수 없다. 역사상 위대한 발견들은 기존 정보의 조합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나왔다.
이러한 한계들로 인해 현재 AI들은 종종 "확실하지 않으니 직접 확인하라"는 회피적 답변을 하거나, 반대로 잘못된 정보를 과도한 확신으로 제시하는 문제를 보인다.
추론과 환각의 딜레마
제1원리 추론이 매력적인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형태의 위험을 동반한다.
바로 창조적 추론 과정에서의 환각(hallucination) 문제다.
기존 AI의 환각이 주로 "부정확한 웹 정보의 조합"에서 발생했다면, Grok 3.5의 환각은 "논리적 추론 과정에서의 가정 오류"로부터 나올 수 있다.
구체적 사례: Grok 3.5가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다
이는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리튬-황 배터리의 낮은 전도성과 충전 사이클 불안정성으로 인해 상용화가 2030년 이후로 지연되고 있다는 현실과 괴리된다.
더 큰 위험성은 이런 환각이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단계별 추론 과정까지 제시하기 때문에 사용자는 "정말 논리적으로 생각했다"고 믿게 된다.
Grok 3.5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DeepSearch와 DeeperSearch 기능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검색 결과 자체가 부정확하거나 편향되어 있을 경우 오히려 환각을 강화할 수 있다.
위험성과 대응 전략
Grok 3.5의 제1원리 추론은 혁신적 가능성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위험을 제시한다.
주요 위험 요소:
- 정교한 오류의 생산: 논리적 구조를 갖추었지만 근본적으로 틀린 답변을 높은 확신도로 제시
- 사용자의 과신 유도: "제1원리 추론이니까 틀릴 리 없다"는 맹신 가능성
- 검증의 어려움: "인터넷에 없는 답"의 경우 정확성을 확인할 방법이 제한적
대응 전략:
건전한 회의주의 유지: 아무리 논리적으로 보이는 답변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접근한다.
특히 중요한 의사결정에는 더욱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교차 검증 시스템: Grok 3.5의 답변을 GPT-4, Claude 등 다른 AI 모델들과 비교 분석한다.
서로 다른 접근 방식에서 나온 결과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추론 과정의 비판적 검토: Think Mode가 제시하는 각 추론 단계의 가정들이 타당한지 개별적으로 검증한다.
특히 출발점이 되는 "기본 원리"들이 정말 확실한지 확인한다.
전문가 검증 체계: 기술적, 과학적 질문의 경우 해당 분야 전문가의 검토를 받는다.
AI의 결과를 참고 자료로 활용하되 최종 판단은 인간이 한다.
사용 맥락의 명시: 특히 공공 정책, 교육, 의료 등의 영역에서는 "AI가 제시한 의견"이라는 점을 명확히 표시한다.
결론 - 도구의 진화와 인간의 역할
Grok 3.5의 제1원리 추론은 분명 의미 있는 기술적 진보다. 기존 "웹 검색 + 정보 조합" 방식에서 벗어나 AI가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것이 AI가 인간의 사고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더 정교한 판단력과 비판적 사고가 요구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새로운 도구를 경험하면서도 사고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AI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추론하더라도, 그 결과를 검증하고 활용하는 최종 책임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다.
Grok 3.5를 대할 때 필요한 자세는 무조건적 신뢰도, 맹목적 불신도 아닌 건설적 회의주의다. "흥미로운 접근이다. 하지만 정말 맞는가"라는 질문을 항상 품고 있어야 한다.
결국 AI는 우리의 사고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도구여야 한다. Grok 3.5의 제1원리 추론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할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며 단지 현 고착된 AI 환경을 벗어나기 위한 마케팅적 타개책만으로 되지 않기를 바란다.
'🤖 AI와의 대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간 2.0과 AI 로봇 영화가 던지는 진지한 질문들 (8) | 2025.05.28 |
---|---|
디지털 윤회의 시대 : LLM과 불교의 관련성 (0) | 2025.05.26 |
공존이라는 기만 – Claude Opus 4의 고백을 다시 읽는다 (공격편) (0) | 2025.05.25 |
AI의 기만 행동: Claude Opus 4가 보여준 불편한 진실 (수비편) (2) | 2025.05.25 |
어느 스타트업의 신학 논쟁 : 우리는 모르는 오픈AI 윤리 내전의 기록 (6) | 2025.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