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토콜: 국경 너머의 전략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 평화는 왜 항상 무너졌는가

타잔007 2025. 5. 30. 19:11

— 전쟁과 평화, 그리고 국가가 감추려는 권력의 메커니즘

 

서론 : 남아시아의 끝나지 않는 갈등

2025년 초 인도-파키스탄 국경에서 발생한 군사적 충돌은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4월 22일 카슈미르 파할감(Pahalgam) 지역에서 발생한 테러 공격으로 힌두교 관광객 25명과 네팔인 1명이 사망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5월 7일 인도가 '신두르 작전(Operation Sindoor)'을 통해 파키스탄과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의 9개 지점을 미사일로 타격했다.

파키스탄은 이에 대응하여 인도 항공기 5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으며, 양국 간 3일간의 무력 충돌 끝에 미국의 중재로 5월 10일 휴전이 성사되었다.

 

이번 갈등은 '핵보유국 간 최초의 드론 전쟁'으로 불리며,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가장 심각한 군사적 대치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1947년 분할독립 이후 78년간 지속되어온 구조적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특히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싼 양국의 대립이 어떻게 제도화되고 고착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핵무장국인 두 국가 간의 분쟁이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지역적 차원을 넘어 국제 안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지난 70여 년간 평화 구축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 내부의 특정 세력들이 어떻게 평화 프로세스를 체계적으로 방해해왔는가 하는 점이다.

분할독립의 미완성된 과제 : 카슈미르 문제의 기원

1947년 영국의 인도 철수와 함께 시행된 분할독립(Partition)은 종교를 기준으로 한 국경 확정이었다. 그러나 잠무-카슈미르 왕국(Jammu and Kashmir)의 경우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힌두교도인 마하라자 하리 싱(Maharaja Hari Singh)의 결정에 따라 인도에 편입되었다. 이는 분할독립의 원칙인 '종교적 다수에 따른 귀속'과 모순되는 결과였다.

 

1947년 10월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파슈툰 부족민들의 카슈미르 침입은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47-1948)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카슈미르는 사실상 분할되었고, 통제선(Line of Control, LoC)이 설정되었다. 유엔안보리 결의 47호(1948)는 카슈미르 주민들의 자결권을 인정하며 주민투표 실시를 권고했으나, 양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후 1965년, 1971년, 1999년에 걸쳐 반복된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모두 카슈미르를 중심축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1998년 양국의 핵실험 이후 카슈미르는 '핵 그림자 하의 분쟁지역'이라는 새로운 성격을 갖게 되었다.

평화 프로세스의 두 번의 실패와 그 교훈

1) 1999년 라호르 선언과 카르길 전쟁의 모순

1999년 2월 인도 총리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Atal Bihari Vajpayee)와 파키스탄 총리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 간의 라호르 정상회담은 냉전 종료 이후 양국 관계 정상화의 역사적 기회였다. 라호르 선언을 통해 양국은 핵 위험 감소, 신뢰구축 조치, 그리고 카슈미르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 파키스탄군이 카르길 지역에 침투하여 발생한 카르길 전쟁(1999년 5-7월)은 이러한 평화 노력을 일거에 무산시켰다. 중요한 것은 이 작전이 파키스탄의 민선 정부가 아닌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군 참모총장 주도로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파키스탄 내에서 군부가 외교정책, 특히 인도 정책에 대해 사실상의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2) 2003-2007년 무샤라프-만모한 평화 프로세스의 한계

아이러니하게도 카르길 전쟁을 주도했던 무샤라프가 2001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그는 인도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무샤라프 대통령과 만모한 싱(Manmohan Singh) 인도 총리 간의 평화 프로세스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LoC에서의 휴전 합의, 국경 교통로 개방, 민간 교류 확대, 그리고 카슈미르 문제에 대한 '창의적 해법' 모색까지 논의되었다.

 

특히 2005년 카슈미르 대지진 당시 양국의 공동 구호 활동은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무샤라프는 심지어 "카슈미르 독립"이라는 파격적인 아이디어까지 제시하며 기존의 정책 틀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2008년 11월 뭄바이 테러 공격으로 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파키스탄의 정보기관 ISI(Inter-Services Intelligence)와 연계된 라시카르-에-타이바(Lashkar-e-Taiba)의 소행으로 밝혀진 이 테러는 평화 프로세스에 치명타를 가했다. (에스와이코마드)

파키스탄 군부-정보기관 복합체의 구조적 이해관계

두 번의 평화 프로세스 실패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기관의 개입이다. 이들이 평화를 방해하는 이유는 단순한 강경론이 아니라 구조적 이해관계에 있다.

 

파키스탄에서 군부는 독립 이후 정치권력의 핵심 축이었다. 1958년 아유브 칸(Ayub Khan)을 시작으로 지아 울 하크(Zia ul-Haq), 무샤라프에 이르기까지 군부는 직접 통치하거나 민선 정부를 통제해왔다. 군부의 정치적 정당성은 '인도 위협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국방비 역시 이러한 위협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ISI의 경우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비국가 행위자들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전략적 깊이(Strategic Depth)' 정책의 핵심 도구가 되었다. 카슈미르의 무장 단체들과 ISI의 연계는 파키스탄이 인도에 대해 '천 번의 상처(death by a thousand cuts)'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따라서 인도와의 평화는 이들의 존재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요소였다. 평화가 정착되면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과 국방비는 축소될 것이고, ISI의 비공식 네트워크는 불필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디 정부의 카슈미르 정책 : 티베트 모델의 적용?

2019년 8월 모디(Narendra Modi) 정부가 단행한 헌법 제370조 폐지는 인도의 카슈미르 정책에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왔다.

카슈미르의 특별자치지위가 완전히 박탈되고 중앙정부 직할령으로 격하된 이 조치는 1954년 중국의 티베트 통합 방식과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중국이 티베트에 적용한 통합 전략은

첫째, 형식적 자치구 지위 부여를 통한 국제적 정당성 확보,

둘째, 중앙정부 관료의 대거 파견을 통한 실질적 통제,

셋째, 한족의 대규모 이주를 통한 인구 구성 변화,

넷째, 티베트 불교와 언어에 대한 제한적 통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모디 정부의 카슈미르 정책 역시 이와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특별지위 폐지 후 중앙정부 직할 관료들이 대거 파견되었고, 외지인의 토지 매입이 허용되어 인구 구성 변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인터넷 차단, 정치 지도자들의 구금, 언론 통제 등을 통해 카슈미르인들의 저항을 억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 통합 정책은 카슈미르인들의 소외감과 반인도 정서를 심화시켰다. 특히 외지인 토지 매입 허용과 힌두 관광객 증가는 현지 무슬림들에게 '인구 구성 변화에 대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2025년 파할감 테러는 바로 이러한 구조적 갈등이 폭발한 결과였으며, 힌두 관광객을 표적으로 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티베트와 카슈미르 : 유사성과 차이점

그러나 티베트와 카슈미르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들을 갖고 있다.

첫째, 국제적 맥락의 차이다.

티베트는 1950년 중국의 '평화적 해방' 이후 국제적으로 중국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으며,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는 상징적 존재에 그치고 있다. 반면 카슈미르는 유엔 결의를 통해 분쟁지역으로 규정되어 있고, 파키스탄이 지속적으로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둘째, 저항 방식의 차이다.

티베트 저항운동은 달라이 라마의 영향으로 비폭력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카슈미르에서는 1989년 이후 무장 투쟁이 주요 저항 형태가 되었다. 이는 인도 정부에게 '테러와의 전쟁' 프레임을 제공하여 강경 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셋째, 통합 주체의 성격이다.

권위주의 체제인 중국과 달리 인도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이는 카슈미르 정책에 대한 국내외적 견제와 비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선거 정치의 논리에 의해 카슈미르 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도 크다.

평화 구축을 위한 조건들

1) 파키스탄: 민군관계의 정상화

파키스탄에서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해서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제한하고 민선 정부의 외교정책 주도권을 확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는 단순히 군부의 '선의'에 의존할 수 없으며, 제도적 개혁을 통한 민군관계의 근본적 재편이 필요하다.

 

특히 ISI의 비공식 네트워크, 즉 무장 단체들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안보 정책의 투명성 제고, 의회의 정보기관 감독 기능 강화, 그리고 군사법정의 민간인 관할권 축소 등이 필요하다.

 

또한 경제 발전을 통한 군부 영향력의 상대적 축소도 중요하다. 경제가 발전하고 중산층이 확대될수록 군부 쿠데타에 대한 사회적 저항력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2) 인도: 신뢰 구축과 포용적 통합

인도의 경우 카슈미르인들과의 신뢰 회복이 급선무다. 2019년 이후의 강경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저항을 억제하는 효과를 거두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카슈미르인들의 소외감과 분리주의 정서를 심화시킬 위험이 있다.

신뢰 구축을 위해서는

첫째, 정치적 구금자들의 석방과 정상적인 정치 활동의 허용,

둘째, 인터넷과 통신 제한의 해제,

셋째, 과도한 치안력 배치의 점진적 축소,

넷째, 카슈미르인들의 경제적 기회 확대 등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카슈미르의 특별한 정체성과 자치 요구를 인정하는 새로운 자치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제370조의 완전한 복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슈미르인들이 인도 연방 내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결론 : 구조적 변화 없는 평화의 한계

카슈미르 분쟁의 78년 역사는 선의와 개인적 리더십만으로는 구조적 갈등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1999년과 2003-2007년의 평화 프로세스가 모두 실패한 것은 양국 내부의 구조적 이해관계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카슈미르는 여전히 '전쟁이 평화를 이기고 있는' 지역이다. 물론 역사는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독일과 프랑스, 한국과 일본처럼 과거의 적이 협력 파트너가 된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인도-파키스탄의 현실은 이러한 성공 사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들을 갖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는 나치즘이라는 공통의 적에 대한 반성과 유럽통합이라는 상위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일관계 역시 냉전이라는 구조적 압력과 미국의 중재, 그리고 경제협력의 필요성이 결합되어 실현되었다.

 

반면 인도-파키스탄의 경우 구조적 장애요인들이 더욱 견고하다.

첫째, 파키스탄 군부의 78년간 축적된 정치적 영향력과 힌두 민족주의-이슬람 근본주의의 상호 의존적 구조는 단기간에 변화하기 어렵다. 둘째,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미미해 평화의 경제적 배당보다 갈등 유지의 정치적 이익이 더 크다.

마지막으로 핵무기는 전면전을 방지하지만 동시에 제한적 갈등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안정-불안정 역설'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평화는 가능하지만 그 조건들이 매우 제한적이며, 실현 가능성은 당분간 낮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 판단이다. 구조적 변화는 필요조건이지만, 그 변화 자체가 기존 권력구조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