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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의 권력 연극 - 남아공 외교의 딜레마와 교훈

타잔007 2025. 5. 26. 19:28

굴욕을 참아야 하는 이유 : 오벌 오피스의 4분간

2025년 5월 21일 오후, 백악관 오벌 오피스.

제12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인 시릴 라마포사는 세계에서 가장 권력이 집중된 방에서 가장 굴욕적인 순간을 맞았다.

트럼프가 "조명을 어둡게 하라"고 지시하자, 두 대의 대형 스크린이 급히 방 안으로 옮겨졌다. 4분간 이어진 영상에는 백인 농부 학살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라마포사는 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지 않았을까? 답은 숫자에 있었다.

그가 참아야 했던 건 개인적 모멸감이 아니라 국가의 생존이었다.

 

2024년 남아공의 대중국 수출은 124억 달러, 수입은 218억 달러로 94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반면 대미국 무역은 82억 달러 수출, 58억 달러 수입으로 24억 달러의 흑자였다.

더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 성장 기회법(AGOA)을 통한 무관세 특혜였다. 이 하나만으로도 남아공 경제에 연간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창출했다.

 

트럼프는 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상을 틀기 전 이렇게 말했다: "라마포사 대통령,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뭔가 해야 합니다."

이는 질문이 아니라 경고였다. '미국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AGOA 특혜를 잃을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라마포사의 반응은 숙련된 외교관의 그것이었다. 영상을 보는 동안 그는 고개를 돌리고 표정을 굳혔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심지어 트럼프가 "이것이 매장지입니다"라며 백인 십자가 영상을 보여주자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차분히 되물었다. 감정적 반응은 상대방에게 추가 레버리지를 제공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중견국 외교의 잔혹한 현실이다.

개인의 존엄성과 국가의 실익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 라마포사가 그 4분을 견딘 것은 굴복이 아니라 계산된 인내였다.

역사적 아이러니: 냉전에서 현실주의로

남아공-미국 관계의 역사는 외교에서 이념과 실익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보여준다. 1948년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은 반공 전선이라는 명분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묵인했다. 소련의 영향력 확산을 막는 것이 인권보다 우선했던 시절이다.

 

1986년 포괄적 반아파르트헤이트법의 통과는 흥미롭게도 의회가 레이건 대통령의 거부권을 뒤엎고 이뤄졌다. 이는 국내 정치적 압력, 특히 시민사회와 흑인 권리 운동의 결과였다. 외교정책이 항상 행정부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은 전형적인 소외국가 동맹(pariah state alliance)을 형성했다. 이스라엘, 대만과의 군사·기술 협력이 그것이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국가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현실주의적 계산이었다.

BRICS와 헤징 전략의 한계

2000년대 남아공의 BRICS 참여는 탈서구적 선택이 아니라 전형적인 헤징 전략(hedging strategy)이었다. 서구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파트너를 확보해 외교적 선택지를 넓히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 전략의 한계는 곧 드러났다. 중국과의 관계는 예상만큼 대등하지 않았다. 인프라 투자와 기술 이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원자재 수출국-제조업 강국이라는 비대칭적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BRICS는 정치적 연대 이상의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고,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를 때마다 한계를 노출했다.

중국 의존의 함정과 미국 회귀의 불가피성

남아공이 중국에 완전히 기댈 수 없었던 이유는 구조적이었다.

 

첫째, 경제적 종속의 심화였다. 중국은 남아공의 철광석, 백금, 망간 등 원자재를 대량 수입했지만, 이는 남아공을 단순한 원자재 공급기지로 고착화시켰다. 제조업 발전이나 기술 이전은 제한적이었고, 중국 기업들은 자국 노동자를 대량 투입해 남아공 고용 창출 효과도 미미했다.

 둘째, 채무 함정의 위험이었다.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통한 인프라 투자는 달콤했지만, 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스리랑카의 함반토타 항구처럼 채무 상환 불능 시 중국에 넘어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남아공 정부는 이런 '채무 외교'의 함정을 일찍 간파했다.

셋째, 기술 접근의 한계였다. 중국은 핵심 기술을 이전하기보다는 완제품 수출을 선호했다. 남아공이 원했던 산업 고도화나 기술 자립은 중국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은 남아공이 저부가가치 원자재 공급자로 머물기를 원했다.

넷째, 통화 시스템의 벽이었다. BRICS가 달러 패권에 도전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역내 무역 결제조차 여전히 달러에 의존했다. 위안화 국제화는 제한적이었고, 남아공 기업들이 국제 금융 시장에 접근하려면 결국 달러와 서구 금융 시스템이 필요했다.

 

무역 수치가 보여주는 현실은 더 명확했다. 2024년 남아공의 대중국 수출은 124억 달러였지만,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은 218억 달러에 달했다. 2023년 기준으로 남아공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97억 달러를 기록했고, 2001년부터 2023년까지 누적 무역적자는 1,148억 달러에 달했다. 반면 대미국 수출은 82억 달러였고,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은 58억 달러로 남아공이 오히려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중국과의 관계가 남아공에게 경제적으로 불리한 구조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은 남아공의 철광석, 백금, 망간 같은 원자재를 가져가고 완제품을 팔아 매년 거의 100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창출했다.

 

반면 미국으로의 회귀가 불가피했던 이유는 명확했다. 우선 시장 접근성이다. 아프리카 성장 기회법(AGOA)을 통해 남아공 제품은 미국 시장에 무관세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는 남아공 수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농산물과 제조업 제품에 결정적이었다.

금융 시스템 접근권도 핵심이었다. 국제 결제, 신용장 발행, 외환 거래 등 모든 것이 미국 중심의 금융 인프라에 의존하고 있었다. SWIFT 시스템에서 배제되면 남아공 경제는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술과 투자의 질적 차이였다. 미국과 유럽의 직접 투자는 고부가가치 기술 이전을 동반했고, 글로벌 가치사슬에 편입될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중국의 원자재 중심 투자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약소국 딜레마의 현실

2025년 현재 남아공이 직면한 상황은 외교학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약소국 딜레마다. 국내적으로는 전력망 붕괴, 30%가 넘는 실업률, 경제 성장 둔화라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대외적으로는 미-중 경쟁의 격화로 중립적 위치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라마포사의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25년 2월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같은 오벌 오피스에서 트럼프와 격렬한 언쟁을 벌이다 조기에 회담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남아공 대통령단은 이 전례를 잘 알고 있었고, 감정적 대응이 가져올 파국적 결과를 예상했다. 그래서 라마포사는 젤렌스키와 다른 선택을 했다—참는 것이었다.

 

라마포사가 백악관에서 견뎌낸 것은 굴욕이 아니라 현실주의적 계산이었다. 미국과의 무역 관계, 특히 아프리카 성장 기회법(AGOA)을 통한 특혜 관세 혜택을 잃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교에서 감정은 사치이고, 국익은 생존이다.

한국 외교의 차별화 전략

남아공 사례가 한국에 주는 교훈은 단순한 경고를 넘어선다. 중견국이 강대국 경쟁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현실은 공통적이지만, 한국은 남아공과는 다른 조건에 있다.

 

첫째, 동맹의 차이다. 남아공은 미국의 파트너였지만 한국은 혈맹이다. 한미동맹의 제도적 안전장치는 일방적 압박을 제한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압박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둘째, 경제적 레버리지의 차이다.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조선업 등에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고리를 차지한다. 남아공의 원자재 의존 경제와는 달리 기술 집약적 경제구조는 더 강한 협상력을 제공한다.

셋째, 다자외교 역량이다. 한국은 G20, OECD, 유엔 등에서 적극적 역할을 하며,  이는 양자 관계에만 의존하지 않는 외교적 다각화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트럼프에는 이런 조건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전략적 모호성을 넘어서

남아공 사례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전략적 모호성의 한계다. 미-중 경쟁이 격화되면서 중립을 표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국은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

 

선택적 협력의 현실주의: 모든 분야에서 자율성을 추구하기보다는 핵심 이익이 걸린 분야에서 선택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전략이 필요하다. 완전한 전략적 자율성은 환상이다.

동맹 내 다양성 추구: 미국과의 동맹 틀 안에서도 일본, 호주와는 다른 접근법을 모색할 수 있다. 동일한 동맹국이라도 각자의 지정학적 조건과 국익은 다르다.

경제 안보의 현실 인정: 반도체 동맹, 배터리 공급망 구축 등은 기술 우위 확보보다는 미중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다. 이를 "차별화된 전략"으로 포장하기보다는 생존 전략으로 인정해야 한다.

 

백악관에서 벌어진 남아공 대통령의 시련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강대국 경쟁의 시대에 중견국이 직면할 수 있는 현실의 한 단면이다.

하지만 똑같은 결과를 맞을 필요는 없다.  차별화된 전략과 다각화된 외교 자산을 통해 우리만의 길을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