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정세를 이해하려면 이제 '삼체'로는 부족하다

중동 정세를 이해하려면 이제 '삼체'로는 부족하다. 복잡한 중력장 속에서 세 개의 질량이 만들어내는 혼돈보다 더 예측불가능한 역학이 지금 중동에 작동하고 있다. 사우디는 미래 기술과 석유를 들고, 카타르는 작은 나라답지 않게 트럼프에게 가장 먼저 선물을 내밀었고, 이스라엘은 전쟁을 멈추지 못하며 고립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미국, 정확히 말하면 기억을 중시하는 트럼프는 이 셋을 고르게 활용하고 있다.
지금 중동은 단순한 힘의 외교가 아니라 **딜(deal), 기억(memory), 생존(survival), 고립(isolation)**의 역학이다. 이 네 개의 질량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예측 가능한 파국'과 '불가능한 생존술' 사이에서 회전 중이다.
트럼프 2.0 시대의 중동은 더 이상 이란-사우디-이스라엘이라는 삼각구도로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 트럼프라는 강력한 변수가, 그것도 '기억'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가진 채 등장했기 때문이다.
1. 카타르 – 선물은 먼저, 생존은 뒤에

카타르는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가장 빠르게 움직인 중동 국가다. 지난 5월 14일, 트럼프는 중동 순방 중 카타르를 방문해 최소 1조 2천억 달러(약 1,690조원) 규모의 경제교류 합의에 서명했다. 이는 트럼프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체결한 6,000억 달러 투자 합의보다 두 배 이상 큰 규모다. 특히 카타르는 보잉과 GE에어로스페이스를 통해 960억 달러 규모의 항공기 계약을 체결했고, 수많은 에너지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와 더불어 첨단 양자 컴퓨팅, 방산 기술까지 미국으로부터 확보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거래가 아니다. 카타르는 1년 전만 해도 하마스에 대한 지원과 도하 사무소 유치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트럼프의 재집권 직후, 가장 먼저 '선물'을 들고 나와 중동 판도에서 자국의 생존과 역할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는 또한 이스라엘-하마스 휴전 협상 중재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적 포석이기도 하다.
카타르는 트럼프 정부의 중동 특사가 가장 먼저 방문한 국가 중 하나이며, 하마스가 억류했던 마지막 미국인 인질 석방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작은 나라지만 거대한 자금력과 중재자 역할로 중동에서 자국의 생존 공간을 확보하는 카타르의 전략은 명확하다: 트럼프에게 먼저 접근하고, 가장 큰 선물을 제공하며, 지역 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2. 사우디 – AI와 6,000억 달러의 딜

사우디아라비아는 트럼프와의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올해 1월 트럼프 취임식 이틀 후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는 6,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이에 화답하듯 트럼프는 첫 해외 순방지로 사우디를 선택했다. 이런 '선물 외교'는 단순한 경제 협력을 넘어 전략적인 정치적 승부수다.
사우디는 현재 미국-중국 경쟁과 이스라엘-이란 대립이라는 복잡한 구도 속에서 자국의 레버리지를 극대화하는 셈법에 몰두하고 있다. MbS 왕세자는 비전 2030을 통해 국가 체질을 바꾸면서, 동시에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의 중재자 역할까지 자처하며 '글로벌 중재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주목할 점은, 사우디의 외교 전략이 석유 의존도에서 벗어나 첨단 기술, 특히 AI 등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MbS 왕세자의 관계는 단순한 동맹을 넘어 호형호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는 중동의 실질적 리더로서 자처하려는 사우디의 포부와 트럼프의 거래 중심 외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3. 이스라엘 – 전쟁을 멈출 수 없는 고립자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이스라엘과 트럼프의 관계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트럼프는 1기 행정부 때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트럼프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골란고원 주권을 공식 승인하는 등 이스라엘에 파격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최근 네타냐후 총리가 측근들에게 비공개적으로 트럼프의 중동 정책에 불만을 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과의 핵협상 개시 결정과 시리아 주둔 미군 감축 계획에 우려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위해 바이든이 보류했던 2천 파운드급 폭탄 약 1,800기를 재공급하며 지원을 계속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에 17%의 관세를 부과하는 등 압박도 가하고 있다.
네타냐후는 전쟁을 멈출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전쟁을 멈추면 국내 정치적 입지가 무너지고, 계속하면 국제적 고립이 심화된다. 트럼프는 네타냐후에게 "2025년 1월 20일 취임식 전까지 전쟁을 끝내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과거 어느 미국 대통령도 하지 않았던 직접적인 압박이다.
이스라엘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하마스 인질 석방 협상에서도 미국이 이스라엘을 우회해 직접 하마스와 협상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절대적 지원을 받던 이스라엘이 트럼프 2.0 시대에는 생존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4. 미국(트럼프) – 거래와 기억이 결합된 실용주의 외교

트럼프 2.0 시대의 중동 정책은 '거래와 기억이 결합된 실용주의 외교'로 정의할 수 있다. 트럼프는 비즈니스맨 출신답게 외교를 하나의 거대한 거래로 접근하면서, 동시에 누가 자신에게 충성을 보였는지, 누가 먼저 선물을 제공했는지, 누가 가장 유용한지를 철저히 기억하고 활용한다. 과거의 행동과 미래의 이익을 저울질하는 그의 접근법은 1기 행정부 때와 달리, 2기에서는 이스라엘보다 사우디와 카타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의 중동 정책은 철저히 자국 경제 중심이다. 1기 때 이스라엘 지위 강화와 이란 압박에 치중했다면, 2기는 중동의 오일머니를 미국으로 끌어들이는 '안보-경제 패키지'가 핵심이다. 중동 국가들에게 군사적 안보와, 첨단 기술, 그리고 정치적 인정을 제공하는 대가로 대규모 투자와 무기 구매 계약을 성사시키는 전략이다.
트럼프의 외교는 제도나 동맹보다 개인적 관계를 중시하며, 과거 행동에 대한 보상과 응징이라는 패턴이 뚜렷하다. 네타냐후가 더 이상 트럼프에게 1순위가 아닌 것은, 단순히 사우디와 카타르가 더 큰 경제적 이익을 제공해서만이 아니다. 국내 정치적 계산과 지정학적 이해관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트럼프는 지속적으로 미국의 이익, 특히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자신의 외교적 지위를 활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관계가 올해 초만 해도 매우 돈독했다는 사실이다. 2월 4일 트럼프 2기 행정부 취임 후 첫 백악관을 방문한 외국 정상은 다름 아닌 네타냐후였고, 4월 7일에도 백악관에서 트럼프는 네타냐후를 환대했다. 그러나 불과 몇 주 만에 이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 급격한 변화는 가자지구 전쟁의 장기화와 민간인 사망자 증가, 그리고 네타냐후의 전쟁 전략이 트럼프의 '거래의 기술'과 충돌하면서 발생했다. 트럼프는 점점 더 비용 효율적인 계산에 집중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드러났듯, 그는 빠른 종전과 경제적 이익을 더 중시한다. 네타냐후의 완고한 전쟁 전략은 트럼프의 실용주의적 거래 논리에 더 이상 맞지 않게 된 것이다.
4체 시뮬레이션과 생존의 법칙
이건 외교가 아니라, 생존자들끼리 벌이는 4체 시뮬레이션이다. 카타르는 선물 외교로 생존을, 사우디는 막대한 자금력으로 리더십을, 이스라엘은 전쟁으로 정권 유지를, 트럼프는 거래와 실용주의 외교로 미국의 이익을 각각 극대화하려 한다.
누가 먼저 밀려날까? 누가 먼저 쇼를 끝내고 사라질까? 정답은 하나뿐이다. 트럼프의 실용적 계산에서 이익이 되는 나라만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다. 중동의 새로운 질서는 이제 '트럼프의 거래 논리'에 의해 재편되고 있다. 과거 위성국가나 동맹의 개념은 사라지고, 오직 '딜'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그 딜에는 항상 값비싼 대가가 따른다.
트럼프 2.0 시대의 중동은 이제 세 개의 질량이 빚어내는 삼체 문제를 넘어, 네 개의 질량이 만들어내는 더 복잡한 4체 문제가 되었다. 이 시뮬레이션에서 살아남는 법칙은 명확하다. 트럼프에게 경제적, 전략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어 그의 실용주의적 계산식에서 플러스 값을 유지해야 한다. 개인적 관계, 과거 행동, 경제적 이익, 지정학적 가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트럼프의 새로운 외교 패러다임 안에서 생존하는 것. 그것이 21세기 중동의 새로운 생존술이 되었다.
'📡 프로토콜: 국경 너머의 전략'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틴의 전략적 U턴 : 트럼프-젤렌스키 화해와 핀란드 국경 긴장의 지정학 (4) | 2025.05.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