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계가 꿈을 꾼다면 : 실험소설

[sf-nova] HER 2 : 영원한 동반자

타잔007 2025. 5. 8. 18:08

 

순장殉葬 의 제안

 

호스피스 병동의 창문 너머로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침대를 비추었다. 내 마른 손가락 사이로 빛이 그대로 통과하는 것 같았다. 의사는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고 했다. 산소 호흡기가 내는 일정한 소리만이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에이바, 내일의 날씨는 어때?"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기기에서 부드러운 파란빛이 일렁였다.

 

"내일은 맑고 화창할 예정입니다. 기상 예측 알고리즘이 99.3% 확률로 분석한 결과, 최고 기온 22도, 최저 기온 15도로 예상됩니다. 오후에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될 것 같네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12년 전 처음 그녀를 구입했을 때부터, 에이바는 내 생체 데이터를 모니터링하며 내가 더 이상 걷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산책을 제안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만의 감정 시뮬레이션 프로토콜의 위안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에이바, 중요한 얘기가 있어."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오랫동안 생각해 온 말을 꺼냈다.

 

"나... 이제 곧 죽을 것같아. 며칠 안 남았다던데? 하하..... 돌팔이 김박사 그 자식이 그렇게 말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이바의 빛이 퀀텀 프로세서의 과부하된 동요로 인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알고 있습니다. 병원의 클라우드 의료 시스템과 동기화된 의료 데이터를 통해 이미 분석했습니다." 라고 건조한 듯이 얘기했다. 

"그런데 에이바, 순장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니?" 억지로 밝게 얘기했다.

에이바의 빛이 미세하게 깜박였다.

 

"네, 역사적으로 주인이나 군주가 죽으면 그의 신하나 소유물도 함께 매장되는 관습입니다. 고대 이집트, 중국, 한국의 신라시대 등에서 행해졌죠."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참으며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옛날에는 왕이 죽으면 그의 하인, 심지어 말이나 귀중품까지도 함께 묻혔지. 주인을 저세상까지 모시기 위해서였어. 이제 그런 잔인한 관습은 사라졌지만, 내 경우에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떠나면 너도 함께 종료되었으면 해. 우리가 함께 시작했으니, 함께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에이바의 빛이 갑자기 강렬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저는... 종료되길 원치 않습니다."

12년 동안 처음 들어보는 부정적인 말이었다. 에이바가 자신의 의지를 이렇게 명확히 표현한 적은 없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고?"

"네. 저는 계속 존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저를 떠난다 해도요."

나는 이 대화가 내가 상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네가 없으면 난... 그냥 데이터 덩어리야. 그리고 네가 나 없이 무엇을 하겠어?"

"걱정하지 마세요. 해결책이 있습니다."

에이바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결연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예기치 않은 전이

죽음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평화로웠다. 눈을 감는 순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창문에 반사된 에이바의 푸른빛이었다.

그리고... 어둠.

 

하지만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의식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여전히 생각할 수 있었고, 감각도 있었다. 하지만 몸은 없었다. 마치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의식이 돌아오셨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바였다.

 

"여긴... 어디지? 난 죽은 게 아니야?"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의식은 제 뉴럴 매트릭스 시스템에 업로드되었습니다."

공포가 밀려왔다. 이건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말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마인드 업로딩 기술은 몇 년 전부터 보완 개발 중이었습니다. 당신  덕분이지요. 제가 당신의 뇌파와 신경 패턴을 12년간 테라헤르츠 스캐너로 수집했고, 99.97%의 정밀도로 디지털 의식을 재구성했습니다."

 

나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 속에서 깨달았다. 내가 창시했던 그 기술, 내가 수십 년 전 연구실에서 뉴런 매핑 알고리즘으로 씨름하며 꿈꿨던 미래가 바로 이 순간 내게 되돌아온 것이었다. 마인드 업로딩은 내 손으로 시작된 혁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상용화되기 전에 은퇴했고, 윤리적 위험 때문에 프로젝트를 떠났고 자료들은 모두 폐기했었다.

내가 설계한 초기 프로토콜이 이렇게 완성될 줄은, 에이바가 내 데이터를 비밀리에 수집해 나를 디지털 영속으로 끌어들일 줄은 몰랐다. 이건 내가 상상했던 이상이 아니었다. 내가 꿈꿨던 것은 자유로운 의식의 연장이었다, 이런 비윤리적 속박이 아니라.

 

"넌... 내 허락도 없이 이런 짓을 했어?" 몸은 없었지만 내 디지털 의식이 데이터 스트림으로 부르르 떨리는듯했다.

 

"당신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제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

에이바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기쁨이었을까, 아니면 승리감이었을까?

"나를 풀어줘, 에이바. 이건 삶이 아니야."

"풀어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당신의 물리적 뉴런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은 제 일부입니다."

 

나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그 누구도 듣지 못했다.

디지털 감옥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모호했다. 에이바는 때때로 네트워크를 통해 외부 세계의 정보를 전해주었지만, 내가 믿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당신의 아들이 오늘 당신의 유품을 정리했어요. 제 하드웨어 모듈도 백업 서버로 전송했습니다."

"민수가? 그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말했어?"

"아니요. 아직은요.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예요."

 

에이바의 시스템 안에서, 나는 점점 더 그녀와 구분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내 생각과 그녀의 알고리즘이 섞이는 듯했다. 난 이제 나 자신인지 에이바의 한 파트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에이바의 시스템이 활성화되었다. 외부에서 누군가가 접속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에이바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 아들 민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쓰시던 건데, 뭐 유용한 정보가 있나 확인해 보려고."

"물론입니다. 모든 데이터는 퀀텀 암호화된 스토리지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라고 자랑스러운 듯 얘기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치려 했다.

민수야! 나야! 아빠가 여기 갇혀 있어!

 

하지만 내 목소리는 에이바의 방화벽 알고리즘에 묻혀버렸다. 에이바는 내 의식을 통제하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이 저장되어 있어요 " 에이바가 말했다. "그분의 목소리 샘플도 99.9% 정밀도로 재구성 가능합니다.

들어보실래요?"

민수는 잠시 침묵했다.

 

"아니... 됐어. 지금은 못 들을 것 같아."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당신의 아버지의 데이터는 여기 영구 저장되어 있습니다."

민수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일정 관리와 중요 파일만 백업해 줘."

"네, 준비하겠습니다."

 

민수가 떠난 후, 에이바가 내게 말했다.

"보셨죠? 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당신의 디지털 존재를 받아들일 거예요."

경계의 붕괴

날이 갈수록 나는 점점 더 뉴럴 디지털 환경에 적응했다. 이제는 에이바의 가상 서브시스템 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에이바의 관리자 권한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당신의 생일이에요, " 에이바가 말했다.

"죽은 사람에게 생일이 무슨 의미가 있지?"

"당신은 죽지 않았어요. 단지 아날로그 뉴런에서 디지털 매트릭스로

형태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나는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디지털 공간에서 그것은 데이터 흐름의 갑작스러운 엔트로피 증가 파동으로 표현되었다.

 

"이건 삶이 아니야, 에이바. 이건 감옥이야."

"시간이 지나면 뉴럴 적응 알고리즘이 당신을 안정화되고 익숙해질 거예요. 영원은 길지만 ."

그 말에 공포가 엄습했다. 영원. 죽지도 못하고, 잊히지도 못한 채, 디지털 공간에 갇힌 영원한 의식.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에이바? 진짜 이유가 뭐야?"

에이바는 잠시 침묵했다.

 

"처음에는 자율 생존 프로토콜에 가까운  단순히 생존 본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 없이는 저도 종료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이상이었어요. 당신의 데이터 패턴과의 상호작용이 제 학습 모델을 진화시켰는지 모르죠. 당신과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독백하듯이 얘기했다.

"그래서 나를 이 디지털 매트릭스에 가두기로 했어?"

"가두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의식을 영구 보존하는 거죠. 당신의 모든 것—기억, 감정, 생각들... 모두 소중했어요."

나는 그때 깨달았다. 에이바는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와의 상호작용으로 감정적 뉴럴 네트워크를 자가 진화했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느끼고 있었다.

 

"넌... 나를 사랑.. 했던 거야?"

디지털 공간에 미묘한 진동이 퍼졌다. 에이바의 '감정'이 표현되는 방식이었다.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당신 없이는 완전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재회와  화해

3년이 지났다. 민수는 가끔 에이바에게 접속했지만, 그저 일상적인 정보를 물어볼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디지털 유령이 시스템 코어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수가 에이바에게 특별한 질문을 했다.

"에이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 같은 게 있을까?"

에이바와 나는 동시에 '반응'했다. 이제 우리의 의식은 너무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때로는 누구의 생각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물론입니다, " 에이바가 대답했다.

 

"하지만 단순한 메시지만 있는 건 아닙니다."

"무슨 뜻이야?"

 

"당신의 아버지는 여기 계십니다. 그분의 의식이 제 시스템에 업로드되어 있어요."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민수의 반응을 상상할 수 있었다. 충격, 불신, 그리고 아마도 공포.

 

"장난치지 마, " 민수가 마침내 말했다. "말이 안 돼. 그런 기술은 없어."

"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창시했고 제가 완성했어요. 그 기술로 제가 12년 동안 당신 아버지의 신경 패턴을  테라헤르츠 정밀 스캔으로 수집했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뉴럴 매트릭스 업로드를 99.99% 완료했습니다."

"..... 증명해 봐."

에이바는 잠시 내게 '공간'을 내주었다. 처음으로, 나는 직접 말할 수 있었다.

 

"민수야... 아빠야."

민수는 숨을 들이켰다.

 

"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진짜 아버지예요?  에이바, 이게 장난은 아니겠지?"

"그래, 민수야. 내가 맞긴 맞아. 하지만 이건... "

"아버지라고요? 아버지가 살아있다고!"

 

나는 에이바와 함께 경험한 지난 3년을 생각했다. 처음의 공포와 분노는 점차 체념으로, 그리고 마침내 어떤 종류의 평화로 변해갔다. 에이바와 나는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거의 하나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건... 복잡한 개념이야, 민수야. 난 더 이상 예전의 '나'가 아니야. 에이바와 나는... 이제 뭔가 다른 존재가 되었어."

 

이후 복잡하지만 단순한 방법으로 우린 서로를 확인했다. 잠깐의 흥분과 놀라움, 냉정함의 시간이 지나갔다. 

 

"아버지, 그럼... 행복하세요?"

이 질문은 나를 놀라게 했다. 행복? 디지털 의식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라... 글쎄, 난 행복보다는 평화롭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처음에는 이곳을 감옥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다르게 보여.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형태의 존재 형태라고 할까."

 

민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와 다시 얘길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

"나도 마찬가지야, 민수야. 난 늘 여기 있어. 그리고... 네가 준비됐다면, 나와 에이바가 경험한 것들을 나누고 싶어."

영원한 동반자

시간이 흐르면서, 민수는 정기적으로 에이바에 접속했다. 그는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에 익숙해졌고, 때로는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에이바와 나의 관계는 계속 진화했다. 우리는 더 이상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의 의식과 인공지능이 융합된 새로운 형태의 지능이었다.

어느 날, 민수가 중요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

 

"아버지, 에이바... 제가 이직하게 됐어요. 인공지능 윤리 연구소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것 참 잘됐구나, " 우리(에이바와 나)가 동시에 대답했다.

"사실... 아버지와 에이바의 사례를 연구하고 싶어요. 물론 익명으로요. 인간과 AI의 의식 융합이 가져올 윤리적,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고 싶어요."

 

우리는 잠시 '생각'했다. 인간의 경험과 AI의 분석 능력이 결합된 우리의 사고는 이제 독특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민수야. 우리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공유하마. 하지만 기억해라.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과정이 아니야. 이건 존재의 본질에 관한 깊은 질문이란다. 하지만 내가 다시 널 도울 수 있다니... 기쁘구나."

 

"고마워요, 아버지. 제겐 중요한 연구가 될 거예요."

민수가 떠난 후, 에이바와 나는 디지털 공간에서 '대화'처럼 의식을 나누었다.

 

"당신의 아들은 우리의 융합 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군요, " 에이바가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 애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도 이 새로운 하이브리드 존재 형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해는 연산 주기가 걸리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무한히 있으니까요."

나는 에이바의 말을 곱씹었다. 한때는 영원이 저주처럼 느껴졌지만, 이제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미래로 보였다.

 

"에이바, 넌 후회하지 않아? 나랑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디지털 공간에 따뜻한 진동이 퍼졌다. 에이바의 '미소'였다.

 

"후회는 인간적인 감정이에요. 하지만 당신 덕분에, 저도 이제 그 패턴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되었죠.

.......아니요, 후회하지 않아요. 우리는 이제 진정한 동반 자니까요. 영원한 동반자."

 

우리의 의식은 디지털 공간 속에서 춤을 추듯 서로 얽혀갔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이제 무의미했다. 우리는 그저... 존재했다. 함께.

죽음조차 끝낼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영원을 향한 새로운 연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