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nova] 기계음 너머의 잉크냄새
번역기 시대의 언어 - 1화

아침은 조용했다.
자율주행차 호출 알림이 뜨기 전까지, 나는 책상 앞에서 일본어 노트를 다시 훑었다.
종이의 까슬한 질감, 손때가 묻은 페이지 모서리.
모두가 번역기에만 의존할 때 혼자 종이를 뒤적이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初めまして、今日は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입 안에서 몇 번이고 굴려본 문장.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오늘은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내 언어로 인사해 보리라 다짐했다.
차에 올라타자 실내가 곧 차가운 침묵으로 채워졌다.
목적지 입력은 자동, 출발도 자동.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보니 운전자들은 저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잠들어 있고, 어떤 이는 책을 읽고, 또 어떤 이는 먹방을 찍고 있었다.
손을 뻗어 내가 설치한 운전대에 살짝 얹었다. 반짝이는 가죽을 두른 이 물건은 아무 기능도 없었다. 그저 내가 멋으로 부착한 장식품일 뿐. 진동도 없고, 힘을 주면 미끄러지듯 빠지는 감촉.
한때 나는 놀이 시설에서 운전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고, 핸들을 돌릴 때 느껴지는 그 작은 저항이 좋았다.
지금 이 가짜 운전대는, 나를 운전하는 착각을 주기 위해 내가 스스로 붙인 장식일 뿐이었다.
회의실에 도착했다.
모두가 형식적인 미소를 짓고, 어떤 이는 귀에 번역기를 꽂고 있었고, 어떤 이는 아무것도 끼지 않고 있었는데 아마 임플란트AI 를 사용하는 듯했다.
벽면 스크린에는 실시간으로 모든 발언이 12개 언어로 번역되어 떠오르고 있었다. 완벽한 소통의 공간이었다.
나는 살짝 숨을 고르고, 준비한 일본어로 말을 꺼냈다.
"初めまして。今日の会議のために準備したことをお話ししたいと思います。"
순간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했고, 또 다른 이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마치 갑자기 누군가가 옷을 벗고 들어온 것처럼.
"아, 번역기 고장이신가요?" 한국인 팀장이 친절하게 물었다.
일본인 상대방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내 귀를 가리켰다.
"トランスレーターを使ってください。その方が助かります。プロトコルですから。"
그 말에는 어떤 미움도 없었다. 그저 당연한 절차를 어긴 사람을 보는 시선이었다. 마치 엘리베이터에서 계단을 이용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처럼.
"실례지만," 옆자리 동료가 작게 속삭였다. "왜 굳이 그러세요? 번역기가 더 정확한데."
벽면 스크린에는 내 일본어가 어설픈 한국어로 번역되어 떠올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 회의를 위해 준비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문법은 맞았지만 어색했다.
"번역 품질에 문제가 있네요."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짜증나게,왜 이어폰을 안쓰는거야."
AI 에어팟을 미리 빼둔 나는 다시 그것을 착용했다.
기계음의 완벽한 한국어가 매끄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회의실의 공기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내 일본어는, 내 목소리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오니 현관이 어둑했다. 자동문이 부드럽게 닫히고, 실내의 조용한 공기가 나를 삼켰다.
나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 노트를 꺼냈다.
페이지 가장자리는 손때로 번들거리고, 몇몇 페이지는 접혀 있었다. 그때의 내 손가락이 남긴 자국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문법 설명 옆에는 낯익은 단어들. 「準備」, 「会議」, 「自己紹介」 흐릿한 필기와 줄 긋기, 메모들이 너저분하게 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한 번쯤 페이지를 쓸어봤다. 기계 번역기가 출력하는 매끄러운 문장보다, 이 어설픈 노트 속 단어들이 훨씬 내 것이었다.
그 순간, 몇 년 전 창고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찾아낸 엄마의 학습서가 떠올랐다.
몽블랑 만년필로 빼곡히 적힌 단어들, 형광펜으로 그어진 밑줄들. 엄마도 이런 식으로 일본어를 배웠을까. 한 글자씩, 한 문장씩.
"아직도 그거 보고 있어?"
문이 덜컥 열리며 동생이 들어왔다. 얇은 고글을 착용하고 있었다.
"오빠는 진짜 특이해. 그 시간에 게임이나 하지. 어차피 말하면 기계가 다 알아서 번역해 주는데 굳이 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이 노트 가장자리를 더듬고 있을 뿐이었다.
동생은 고개를 흔들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방 안의 어둠이 다시 스며들었다.
나는 노트를 다시 펼쳤다.
손끝에 만져지는 종이의 감촉,
벼룩시장에서 사 온 몽블랑 만년필의 잉크 냄새, 그 모든 게 내 하루 중 가장 생생한 순간이었다.
천천히 한 문장을 적었다.
「今日は自分の言葉で話した。」
몽블랑 만년필의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며, 그 작은 점 하나하나가 나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방구석의 작은 AI 스피커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새어 나왔다.
"왜 꺼뒀던 거지? 오늘 하루 통역 데이터가 너무 적어서 분석이 어려워."
나는 펜을 멈췄다.
꺼뒀던 개인 AI가 스스로 깨어난 것이었다.
"손글씨? 또 일본어 공부? 그건 비효율적이야. 필요하면 내가 통역해 줄 수 있어. 왜 이런 방식을 고집하는 거지?"
AI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이해할 수 없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만년필을 들어 다음 문장을 썼다.
「AIではなく、自分の言葉で。」
AI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이건 학습 기록에 저장할 필요가 없겠지? 비효율 데이터니까."
나는 노트를 덮었다.
그 순간만큼은, 기계가 나를 보지 못하도록 숨기고 싶었다.
창밖에는 자율주행 차량의 붉은 미등과 광고판의 번역기 로고가 번쩍였다. 손을 또다시 허공의 가짜 운전대 위를 더듬었다.
물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운전은 내가 아니라 기계가 하는 일.
언어도, 말도, 이제는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트 속 내 글씨만큼은 여전히 내 것이었다.
어설프고 느리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