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차된 시선 : 영화 그리고 AI

마운틴헤드 (Mountainhead) – AI 시대의 인간 풍자극

타잔007 2025. 6. 5. 19:49

-- AI보다 위험한 건, 그것을 쥔 인간의 욕망이다

쿠팡플레이, HBO

쿠팡플레이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HBO 작품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25년작 HBO의 「마운틴헤드(Mountainhead)」라는 제목과 함께 "AI 시대 테크 엘리트들의 어두운 진실"이라는 소개 문구가 눈에 띄었다. 호기심에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이 영화는 단순한 AI 코미디 스릴러가 아니었다.

 

미디어 재벌 가문의 권력 다툼을 그린 화제작 「석세션(Succession)」으로 에미상을 휩쓴 제시 암스트롱 감독의 신작이어서 기대를 했지만  109분을 다 보고 나니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분명 현재 실리콘 밸리 AI 업계의 민낯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지만, 영화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권력자들의 리얼한 자화상

영화는 유타주 외딴 산장 '마운틴헤드'에 모인 네 명의 억만장자를 그린다.

베니스(코리 마이클 스미트)는 딥페이크 기능으로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SNS 플랫폼 '트라암'의 CEO다.

제프(라미 유세프)는 진실 검증 AI '빌터'를 개발한 창업자로, 기술적 양심과 자본의 유혹 사이에서 흔들린다.

랜들(스티브 카렐)은 죽음을 앞둔 벤처 캐피탈리스트로 디지털 불멸을 꿈꾸고,

휴고(제이슨 슈왈츠만)는 명상 앱을 운영하며 선량함을 가장하지만 결국 무력하다.

랜들, 휴고, 제프 그리고 베니스 (HBO)

AI 업계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 이들의 설정은 소름끼칠 정도로 현실적이다.

베니스의 트라암이 보여주는 생성형 AI의 무분별한 배포는 현재 ChatGPT, 미드저니 등의 급속한 상용화와 정확히 일치한다.

딥페이크로 인한 사회 혼란은 이미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고, 제프의 AI 팩트체킹 기술 역시 현재 구글, OpenAI 등이 개발 중인 시스템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각 인물이 현실 속 테크 리더들의 특징을 정확히 포착했다는 점이다.

베니스의 "지구는 괜찮은 스타터 플래닛" 발언은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 계획을 그대로 패러디한 것이고,

랜들의 생체 데이터 집착은 실리콘밸리의 바이오해킹 문화를 반영하는 등, 이런 디테일들이 영화에 날카로운 현실성을 부여한다.

풍자는 날카롭지만, 영화는 얕다

영화가 제시하는 AI 사용자 유형 분석은 흥미롭다.

 

베니스는 AI를 무기화하는 감정 조작형 사용자, 제프는 AI를 윤리적 도구로 보려다 실패한 메타인지형 이상주의자, 랜들은 AI를 욕망의 연장선으로 보는 디지털 불멸 집착형, 휴고는 AI를 치유 수단으로 쓰려는 자기 완결형 무력한 이상주의자다.

네 명이 각각 현재 AI 업계의 전형적 인물상을 대변한다는 설정은 분명 영리하다.

 

하지만 영화적 완성도는 아쉽다. 암스트롱이 이 작품을 "5년간 고민하기보다 빠르게 달려들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는데, 그 성급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장 큰 문제는 캐릭터들이 상징적 기능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작 「석세션」에서 미디어 재벌 가문의 복잡한 심리와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냈던 암스트롱이지만, 여기서는 인물들이 평면적인 캐리커처에 머문다.

HBO

베니스는 그저 "AI를 무기화하는 자"의 전형이고, 제프는 "윤리와 자본 사이에서 갈등하는 개발자"라는 설정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러닝타임 109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네 명의 복잡한 내면을 그려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대화 역시 지나치게 설명적이다.

인물들이 자신의 철학과 동기를 직접적으로 말로 설명하는 장면이 많아, 자연스러운 몰입보다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

특히 후반부 갈등이 극대화되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행동이 개연성보다는 플롯의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느낌이 강하다.

 

휴고라는 캐릭터를 끝까지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도 불편하다. 선의를 가진 인물마저 비웃는 서구적 냉소주의가 과도하게 느껴진다. 이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더욱 거리감을 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의미 있는 현실 진단

하지만 이 영화의 가치를 완전히 폄하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AI 자체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AI를 사용하는 인간들의 욕망과 무책임함에 집중한다.

"AI는 망치일 뿐이다. 누가 그것을 쥐느냐가 세상을 결정한다"는 메시지도 분명하고 적절하다.

 

현재 AI 업계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도 드물며 기술 결정론을 거부하고 사회적 맥락에서 AI를 바라보는 관점은 올바르다.

특히 베니스가 보여주는 무책임한 기술 배포, 제프의 윤리적 타협, 랜들의 기술적 오만함은 현실 속 테크 리더들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로튼 토마토에서 비평가 점수 80%, 관객 점수 30%라는 극명한 차이가 이 영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데, 전문가들은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평가했지만, 일반 관객들은 영화적 재미를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만약 한국에서 비슷한 AI 풍자극을 만든다면 어떨까?

기생충이 우리만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해석했듯 미국식 실리콘밸리 풍자 대신 우리만의 맥락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재벌 3세가 AI 사업에 뛰어들지만 본질적으로는 구시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 정부와 유착해 AI로 여론 조작을 시도하는 기업가, 겉으로는 ESG와 AI 윤리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대기업 투자 유치에만 관심 있는 스타트업 대표 등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위계 문화, 집단주의적 여론 형성, 정부-대기업 간 유착 구조가 AI 기술과 만날 때 벌어지는 독특한 갈등들을 포착한다면, 「마운틴헤드」보다 더 깊이 있는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어느 대상을 희화하하는 것이 가당 키나 할지 의문이긴 하다.

아쉽지만 약간은 필요한 영화

결국 「마운틴헤드」는 완성도 높은 영화는 아니다.

성급하게 만들어진 티가 나고, 캐릭터는 평면적이며, 영화적 재미도 부족하다. 하지만 현재 AI 시대의 핵심 문제를 정확히 짚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영화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내가 만드는 기술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며, 그들이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기술의 중립성이라는 편리한 변명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완벽하지 않은 영화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나올 필요가 있었던 작품이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일수록, 그 기술을 다루고 운영하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은 더욱 무거워진다.

「마운틴헤드」는 바로 그 무게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