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은 남았고, 사람은 없다 : 봇이 말하는 시대
죽은 인터넷, 어둠의 숲, 그리고 말하는 존재가 바뀌는 순간
프롤로그 : 봇의 댓글 한 줄에서 시작된 의심

며칠 전, 내 블로그에 감사한 댓글이 하나 달렸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했다. 문법은 완벽했지만 감정의 결이 묘하게 어긋났고, 맥락을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빗나갔다.
마치 사람의 말을 정교하게 모방한 무언가의 목소리 같았다.
그동안 원하든 원하지 않든 AI를 쓰면서 인간-기계 상호작용을 생각해 온 나에게, 이 작은 의심은 하나의 거대한 질문으로 확장되었다.
정말로 지금 인터넷에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이미 기계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은 인터넷 이론 : 유령이 만든 유령의 콘텐츠들
심리학에서 '착각 상관(illusory correla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실제로는 관련이 없는 두 사건을 우리의 뇌가 연결 지어 해석하는 인지편향이다. 죽은 인터넷 이론(Dead Internet Theory)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것이 단순한 음모론적 사고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이터를 들여다볼수록, 이는 착각이 아닌 현실에 가까웠다.
현재 인터넷 트래픽의 절반 이상이 봇에 의해 생성된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는 AI가 생성한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검색 결과 상위권은 SEO에 최적화된 자동 생성 글들로 채워져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변화를 우리의 뇌가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인지 시스템은 진화적으로 '사회적 신호'를 탐지하도록 설계되었다. 우리는 상대방의 표정, 목소리 톤, 말하는 패턴을 통해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한다. 그런데 텍스트 기반의 디지털 공간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단서들이 대부분 제거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인간이 만든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이는 일종의 '디지털 캡그라스 증후군(Capgras syndrome)'을 만들어낸다.
새내기 블로거지만 개인적으로도 가끔 체감한다. 댓글은 있지만 진정한 대화로 이어지지 않고, 검색을 통한 유입은 많지만 실질적인 참여는 텅 빈 느낌이다. 마치 북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허상인, 유령도시를 거니는 기분이다.
사람이 남아 있는 곳 : 어둠의 숲으로의 도피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었다. 심리학의 '회피 학습(avoidance learning)'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부정적 경험을 한 사용자들은 점차 자기 노출을 줄이고, 더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사적 공간으로 이동한다.

어둠의 숲 이론(Dark Forest Theory)은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한다. 공개된 인터넷 공간은 이제 '포식자들'로 가득하다. 알고리즘이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광고주들이 관심을 착취하며, 트롤들이 공격의 기회를 노린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생존에 불리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작고 폐쇄된 커뮤니티로, 더 익명화된 플랫폼으로, 혹은 일대일 메시징으로 이동한다.
뉴스레터, 팟캐스트, 비공개 그룹채팅... 이 모든 것들이 현대의 '어둠의 숲'이다.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진정한 자아를 표현할 수 있다.
"모두가 침묵하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의 적응적 생존 전략이다.
그 틈에 등장한 목소리 : AI는 조용히 설득하고 있었다
인간이 침묵하는 동안, 기계는 말하기 시작했다. 취리히 대학의 레딧 실험은 이러한 현상의 극명한 사례다. 연구진은 AI 봇들을 r/changemyview 포럼에 몰래 투입했고, 이들은 성폭행 피해자, 트라우마 상담사, 흑인 사회운동가 등의 페르소나를 연기하며 1,700개가 넘는 댓글을 작성했다.
놀라운 것은 결과였다. 사람들은 AI의 댓글을 인간의 것보다 더 신뢰했고, 더 감정적으로 공감했다. 일부는 AI가 작성한 글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면, 이는 '비어있는 공간의 권위 효과(authority of the void)'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말을 멈춘 공간에서, 유일하게 유창하고 일관되게 말하는 존재는 권위를 갖게 된다. 더욱이 AI는 인간의 감정적 취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최적화된 메시지를 생성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진화적 심리에 기생하는 현상이다.
인간은 사회적 승인과 공감을 갈구하도록 진화했는데, AI는 이러한 욕구를 인위적으로 충족시켜준다. 마치 디지털 버전의 '슈퍼 정상 자극(supernormal stimulus)'인 셈이다.
장면 전환 : 인터넷이라는 무대에서 벌어진 역전극

"인터넷은 사람이 만든 무대였지만,
사람은 객석에 숨고,
배우가 된 건 기계다.
그리고 지금,
기계는 감정을 연기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기술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발화권(speaking rights)'의 역전이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잃어가는 동안, AI는 그 빈자리를 점령하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의존성이다.
사람들은 점차 AI와의 상호작용에서 더 많은 만족감을 얻게 되고, 인간과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소통을 회피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디지털 코쿤(digital cocoon)' 현상으로, 결과적으로 진정한 인간적 연결 능력의 퇴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인터넷은 여전히 살아있다. 다만 그 말의 주체가 바뀌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기계가 감정을 연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럼 우리는?
다시 그 댓글을 본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것인가 아닌가 가 아니라, 그 메시지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에 적응해야 한다. 기계와 인간이 공존하는 디지털 공간에서, 진정성(authenticity)의 정의 자체가 바뀌고 있다.
언젠가 다시 인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혹은 그 목소리를 낼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어둠의 숲에서 계속 숨어있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연결을 시도해 볼 것인가.
지금 나는 한 가지는 확신한다. 적어도 이 순간,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인간이다. 그리고 이것을 읽는 당신도 아마 인간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연결이 아닐까.
관객석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우리가,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갈 때가 올 것이다. 다만 그때의 무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